맨위로가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그는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맞서 싸웠으며, 시라쿠사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르켈루스는 갈리아 부족장과의 일대일 결투에서 승리하여 스폴리아 오피마를 획득하고, 시라쿠사 공방전에서 아르키메데스를 죽인 병사를 처벌하는 등 용맹함과 함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다. 그는 다섯 번이나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한니발은 그를 "로마의 검"이라고 칭하며 두려워했다. 마르켈루스는 정찰 중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했고, 한니발은 그의 장례를 정중히 치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발사체 무기로 죽은 사람 - 마하반둘라
  • 고대 로마의 아우구르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케도니쿠스' 칭호를 얻었지만 에피루스 약탈로 비판받기도 하며 로마의 영웅적, 제국주의적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 고대 로마의 아우구르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스키피오 가문에 입적되어 제3차 포에니 전쟁과 누만티아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으며, 감찰관으로 사회 풍기를 바로잡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에 반대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활동했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르켈루스를 묘사한 주화, 기원전 55년
기원전 55년, 마르켈루스를 묘사한 주화
이름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로마자 표기Marcus Claudius Marcellus
별칭로마의 검
출생기원전 270년경
사망기원전 208년
사망 원인전투 중 사망 (창에 찔림)
사망 장소페테리아 (현재 페틸리아폴리카스트로 근교)
국적로마 공화정
직업장군, 정치가
가문클라우디우스 씨족
자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기원전 196년 집정관)
정치 경력
아에딜리스기원전 226년
아우구르기원전 226년 ~ 기원전 208년
법무관기원전 224년, 기원전 216년
집정관기원전 222년, 기원전 215년 (대리), 기원전 214년, 기원전 210년, 기원전 208년
군사 경력
소속로마 공화정
주요 전투제1차 포에니 전쟁
갈리아 전쟁 (기원전 225년)
클라스티디움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
시라쿠사 공성전
누미스트로 전투
카누시움 전투
제1차 노라 전투
제2차 노라 전투
제3차 노라 전투
카푸아 공성전
획득 훈장스폴리아 오피마

2. 생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22년 집정관에 선출되어 갈리아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갈리아 부족장 비리도마루스와 일대일로 싸워 이겨 큰 공을 세웠다.[1]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마르켈루스는 처음에는 시칠리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싸웠으나, 칸나에 전투 이후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왔다. 기원전 216년 프라에토르(법무관)로 선출되어[2] 수에술라 근처에 주둔하면서 놀라를 방어 했다. 기원전 214년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이 된 그는 카푸아 북쪽의 카실리눔 성채를 탈환하여 캄파니아 지방에서 한니발의 중요한 거점을 빼앗았다.[2] 이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공략에 집중하였다.

당시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여러 신무기로 로마군을 괴롭혔다. 기원전 213년부터 1년 넘게 공격했지만 함락되지 않던 시라쿠사는 기원전 212년 아르테미스 축제로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성벽 공략에 성공했고, 이듬해인 기원전 211년 완전히 함락되었다.[1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를 살려 오라고 명령했지만, 혼란 속에서 한 병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했다.[7][12]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죽인 병사를 처벌했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라쿠사의 많은 그리스 문화재와 미술품을 보호하여 로마로 옮겼다.[12]

기원전 210년 마르켈루스는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어 이탈리아 본토에서 한니발과 2년여 동안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208년 다시 집정관에 취임한 그는 한니발을 추격하던 중 정찰을 나갔다가 누미디아 기병에게 발각되어 전사했다.[1] 한니발은 그의 장례를 정중히 치르고 유골을 마르켈루스의 아들에게 돌려보냈다.[1]

2. 1. 초기 생애와 경력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가 소개하는 포세이도니오스의 설에 따르면 이 씨족에서 처음으로 마르켈루스를 칭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평민(플레브스)계 클라우디우스 씨족에서 처음으로 정무관에 취임한 것으로 보이는, 기원전 331년의 동명의 집정관의 증손자로 추정된다.[2] 그는 굳센 성격과 전쟁을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났으며, 전장을 떠나면 온건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고대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마르켈루스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268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추정한다. 그 이유는 그가 기원전 222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을 때 42세 이상이었어야 했고, 기원전 208년에 다섯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60세가 넘었기 때문이다.[1]

젊은 시절, 마르켈루스는 군사적 재능을 보이며 육탄전에 능숙한 전사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탈리아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의 형제 오타킬리우스를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하여 시칠리아 섬에서 카르타고 군과 싸웠으며, 용맹함으로 상관들에게 칭찬을 받았다.[1]

기원전 226년, 마르켈루스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안찰관(아이딜리스 쿠루리스)과 아우구르에 취임했다.[1] 안찰관은 공공 건물과 축제를 감독하고 공공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가 안찰관으로 재직하던 기간 중, 그의 아들에게 동료인 스칸티니우스 카피톨리누스가 접근했고, 마르켈루스는 그를 고발하여 유죄 판결을 받게 했다.

기원전 224년경에는 법무관(프라에토르)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 2. 갈리아 전쟁 (기원전 225년 ~ 222년)

기원전 222년 집정관에 취임한 마르켈루스는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그는 갈리아 부족장 비리도마루스와 일대일로 싸워 이겼다고 한다.[1]

반세기 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갈리아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232년 호민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성립시킨 토지 분배법이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기원전 225년 테라몬 전투에서 보이족을 격파했지만, 북쪽의 인수브리아인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기원전 222년 집정관에 취임한 마르켈루스는 갈리아 트란살피나에서 온 갈리아 용병 가에사타에와 클라스티디움 부근에서 조우한다(클라스티디움 전투). 마르켈루스와 비리도마루스는 서로를 확인하고 달려들어 일대일 결투를 벌였고, 마르켈루스가 그를 죽였다. 마르켈루스는 비리도마루스에게서 빼앗은 무구를 신에게 바치고, 로마 최고의 영예인 스폴리아 오피마를 획득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비리도마루스는 지휘관 표식을 한 마르켈루스를 보고 그에게 말을 몰았다고 한다. 마르켈루스는 비리도마루스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싸우기를 원했다. 그는 신에게 적의 가장 훌륭한 갑옷을 달라고 기도했고, 비리도마루스의 갑옷이 그 설명에 맞는 듯했다. 두 사람은 단독 전투를 벌였고, 마르켈루스는 창으로 비리도마루스의 흉갑을 꿰뚫고,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그를 쓰러뜨린 후, 추가 공격으로 즉사시켰다.[1] 마르켈루스는 이 갑옷을 "가장 풍성한 전리품"이라는 뜻의 ''스폴리아 오피마''라 칭하며 유피테르 페레트리우스 신전에 봉헌했다.

이 전투 후, 마르켈루스는 메디올라눔(지금의 밀라노)에서 고전하던 동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구원하고, 메디올라눔을 함락시켰다. 로마 귀환 후, 마르켈루스만이 개선식을 거행했다.

2. 3.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년 ~ 201년)

기원전 222년 첫 집정관 임기 동안 갈리아 원정에서 승리하고 갈리아 부족장 비르도마루스를 일대일로 싸워 이긴 마르켈루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칠리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싸웠으나, 칸나에 전투 이후 이탈리아 본토로 돌아왔다.[2]

기원전 214년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이 된 마르켈루스는 카푸아 북쪽의 카실리눔 성채를 탈환하여 캄파니아 지방에서 한니발의 중요한 요충지를 빼앗았다. 이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공략에 집중했다.

2. 3. 1. 초기 활약 (기원전 216년 ~ 215년)

기원전 218년에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칸나이 전투 패배 후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 쿤크타토르의 지구전을 채택했지만, 마르켈루스는 대규모 회전을 피하면서 한니발 군에게 과감하게 전투를 걸었다. 그리고 제1차 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니발 상대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칸나이에서 침체된 로마인들을 격려했다.[2]

기원전 21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3년차에 마르켈루스는 프라에토르(법무관)로 선출되었다. 프라에토르는 행정관 또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봉사했는데, 마르켈루스는 군 지휘 임무를 위해 시칠리아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2] 그러나 마르켈루스와 그의 군대가 시칠리아로 출발을 준비하는 동안, 칸나에 전투에서의 엄청난 손실(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인해 그의 군대는 로마로 소환되었다.[5] 로마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에게 대패한 후,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1,500명의 병력을 로마로 파견해야 했다. 칸나이 전투의 잔여 병력과 함께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마르켈루스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인 수에술라 근처에 주둔했다. 이 때 카르타고 군대의 일부가 놀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마르켈루스는 공격을 격퇴하고 한니발의 손에서 도시를 지켜냈다. 놀라에서의 전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전체와 관련하여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 승리는 "한니발이 아직까지 받은 첫 번째, 비록 사소하지만 저지였다는 점에서 도덕적 효과가 중요했다."[2]

기원전 215년, 로마 독재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에 의해 로마로 소환된 마르켈루스는 전쟁의 미래 수행에 대해 그와 상의하였다. 이 회의 후 마르켈루스는 프로콘술(집정관 대행)이 되었다.[2] 같은 해,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로마인들은 마르켈루스를 그의 후임으로 만장일치로 선택했다. 그러나 리비우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다른 집정관도 평민이었기 때문에 나쁜 징조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결국 마르켈루스는 물러났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원로원은 두 명의 평민 집정관을 두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2] 마르켈루스는 프로콘술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그는 다시 한 번 한니발 군대의 후위로부터 놀라 시를 방어했다.

2. 3. 2. 시라쿠사 공방전 (기원전 214년 ~ 212년)

기원전 214년, 마르켈루스는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어 시칠리아로 파견되었고, 시라쿠사 공방전을 지휘하게 되었다.[2] 당시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여러 가지 신무기를 활용하여 로마군을 괴롭히고 있었다.[12]

마르켈루스를 기리는 기원전 55년의 동전: 뒷면에는 그가 스폴리아 오피마를 유피테르에게 헌납하는 모습이, 앞면의 트리스켈리온은 시칠리아에서의 그의 승리를 기념한다.


마르켈루스는 레온티니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도시에 있던 로마 탈영병 2,000명을 처형하고 시라쿠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헬로루스, 메가라, 헤르베수스와 같은 반란 도시들을 점령하고 돌아온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12년 여름, 시라쿠사 인들과의 외교 회담에서 발견한 성벽의 약점을 공격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 공방전은 아르키메데스의 군사 기계에 의해 방해받아 2년 동안 지속되었다.[2]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살려 오라고 명령했지만, 시라쿠사 함락의 혼란 속에서 한 로마 병사가 아르키메데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했다고 한다.[7][12]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죽인 병사를 처벌했다고 한다.[12]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의 그리스 문화재와 예술품을 보호하고 로마로 가져왔는데, 이는 로마 문화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이 처음으로 크게 나타난 사건 중 하나였다.[5]

2. 3. 3. 이탈리아에서의 전투와 죽음 (기원전 210년 ~ 208년)

기원전 210년, 마르켈루스는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어 이탈리아 본토에서 한니발과 맞섰다.[2] 마르켈루스는 아풀리아에서 로마 군대를 지휘하며[2] 카르타고군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우선 살라피아를 점령하고, 사무니움 지역의 두 도시를 정복했다.[2] 이후 마르켈루스와 한니발은 누미스트로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로마가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2] 이 전투 이후에도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을 계속 견제했으나, 결정적인 전투는 피했다. 이는 마르켈루스가 의도적으로 소모전 전략을 펼쳤기 때문으로 보인다.[8]

기원전 209년, 마르켈루스는 프로콘술로 임명되어 군대를 계속 지휘했다.[9] 그 해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의 군대와 여러 차례 소규모 전투와 습격을 벌였지만, 전면전은 피했다.[9] 기원전 208년, 마르켈루스는 다섯 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하여 베누시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1] 동료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누미디아 기병으로 구성된 카르타고 군대에 기습을 당해 전사했다.[1][2] 며칠 후, 크리스피누스도 부상으로 사망했다.[2]

한니발은 마르켈루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정중한 장례를 치러주고, 유골을 금관이 씌워진 은 항아리에 담아 마르켈루스의 아들에게 보냈다.[1]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유골이 아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항아리가 전달되었다고 전해진다.[1] 두 집정관의 죽음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공화국이 단일 전투에서 두 명의 최고 지휘관을 잃었고, 강력한 카르타고 군대가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3. 평가 및 일화

마르켈루스는 용맹하고 결단력 있는 군인이었으며, 동시에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인물이었다. 한니발은 마르켈루스를 "파비우스는 스승이지만 마르켈루스는 적이다"라고 평가하며 그의 능력을 경계했다.[19]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 '영웅전'에서 마르켈루스를 펠로피다스와 비교하며, 두 영웅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가했다. 키케로는 마르켈루스가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다고 칭찬했다.[20]

플루타르코스는 마르켈루스가 spolia opima 획득자라는 점을 들어, 로마 역사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Spolia opima는 로마 장군에게 수여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오직 장군이 장군을 죽이는 격전에서 먼저 획득한 전리품만이 'opima'이다."라고 말했다. 로마 역사에서 이 상을 받은 사람은 로물루스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단 두 명뿐이라고 전해지며, 마르켈루스는 이 셋 중 그의 업적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유일한 인물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또한 마르켈루스가 그리스 예술과 학문을 이탈리아 도시로 가져온 선구자 중 한 명으로서 "로마의 문명화가"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참조

[1] 간행물 "Life of Marcellus", The Parallel Lives 2008-04-30
[2] 간행물 "M. Claudius M. f. M. n. Marcellus",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Little 1867
[3] 간행물 Polyb. 2.34
[4] 논문 "The Tradition of the Spolia Opima: M. Claudius Marcellus and Augustus", Classical Antiquity 2000-04
[5] 웹사이트 Marcus Claudius Marcellus 2008-11-26
[6] 서적 Roman Coins Thames and Hudson Ltd. 1978
[7] 웹사이트 Death of Archimedes: Sources http://www.math.nyu.[...] Courant Institute of Mathematical Sciences 2010-09-28
[8] 서적 Livy: Hannibal's War 2009
[9] 서적 Livy: Hannibal's War 2009
[10] 웹사이트 Marcellus http://classics.mit.[...]
[11] 서적 有名言行録
[12] 서적 有名言行録
[13] 서적 有名言行録
[14] 서적 有名言行録
[15] 서적 有名言行録
[16] 서적 有名言行録
[17] 서적 有名言行録
[18] 서적 ローマ建国史
[19] 서적 ローマ建国史
[20] 서적 ウェッレス弾劾演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